"그때는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름을 인정했다."
선배님 광고 콘티를 만들었는데 오늘 카페에서 잠시 시안 확인 가능할까요?
주말에 조금 쉬고 싶었는데 후배는 다급했나 보다. 그래 괴정 사거리 커피숍에서 보자
후배와의 인연은
20년 전 나는 광고기획사에서 일을 하였다. 때 마치 영업사원이 필요했었고 벼룩시장에 구인광고를 게재하였다. 구인 광고를 내면서도 이 회사는 비전이 있는 회사가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구인을 내었다.
어느 날 아침 스포츠머리를 하고 면접 보러 왔다. 군대를 갖 제대했는지 몰라도 눈빛에는 이글이글 열정이 타올라랐다. 과장님 저 이곳에서 꼭 일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저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였다. 난 사실 그 신입사원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회사에 뼈를 묻게 다는 그 말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 모집인원은 00명이었고 면접만 봐도 누구든 합격할 수 있는 회사였지만 그 날 따라 광고일을 왜 하느냐하며 캐캐 물었다. 하얀 와이셔츠에는 땅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사실 회사 사정이 여 여치 않아 에어컨도 틀 수 없었고 돌아가는 푸른 선풍기는 타그닥 거렸다.
면접 보러 5명이 왔는데 영민이라는 이 친구와 영도에 사는 경리를 뽑게 되었다. 무뉘만 광고 회사지 우리 회사는 광고 영업 업무였다. 그리고 그 신입사원한테 합격했어니 내일부터 정식 출근하라고 했다. 참 이상한 건 월급은 얼마예요? 보너스는 어떻게 되나요? 이 회사 들어오면 제가 무슨 일 하는지요? 이런 것도 묻지 않았다.
밤에 그 신입사원이 자꾸 떠 올랐다. 영업이 안되면 월급도 없고 교통비나 밥값도 본인이 다 해결해야 된다고 했더니 무조건 취업만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열정과 순수로 가득 차 있었던 신입 사원이었다.
그래서 채용하게 되었다.
첫 출근날 걸레로 복도 사무실 할 것 없이 정말 청소를 했다. 사실 우리 회사는 사장과 나 둘이서 일을 하는 회사여서 1년이 다돼가도록 나는 사무실 청소도 하지 않았다. 조금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이 사원은 정말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대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업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은 문전옥답, 벼룩시장, 부산시대, 교차로 등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였다.아침에 그 모든 일간지를 다 모아서 광고할 만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오더를 따오는 임무였다. 어느 곳에 전화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영업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네 과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첫 전화업무를 시켰는데 배가 아프다는 등 조금만 있다가 할게요.
그래 될 수 있으면 빨리 마케팅 전화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고 전화를 안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있었는데 둘째 날에도 여전히 회사로 제일 먼저 출근하고 사무실 청소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오늘은 영업 마케팅일을 하겠지 했는데 여전히 전화기 앞에만 있었고 홍보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왜 전화를 하지 않냐고 재촉하니 네 알겠습니다. 곧 하겠습니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우리 회사는 수당제라 그렇게 하다간 한 달에 월급을 못 가져갈 수도 있다고 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러다가 어느 듯 한 달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사장님한테 영민이라는 사원은 우리 회사와 맞지 않다고 사장님께 보고드렸다.
일단 한 달 더 지켜보자 하자고 했는데 여전히 홍보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월급날이 되었다. 당연히 월급은 아주 소액만 지불하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영민 씨는 우리 회사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더니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일을 하지 않았다. 월급은 고사하고 회사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고 나는 고심이 많았다. 나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영업 오더를 몇 군데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신입사원의 월급까지 내가 만들어야 했다.
과장님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그리고 그때 여자 직원을 한 명 더 채용했는데 그 경리 이름은 양옥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회사가 어려워졌고 나도 한계에 온 것 같아서 회사를 그만 둘 사항이었다. 우리 사장은 아침에 출근도 하지 않고 전화로만 업무 보고를 받았다. 이 회사에서 총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신입사원은 회사를 그만두었고나도 1년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한테 3개월 월급을 못 받았지만 그때는 순진해서 그런지 고발 고소 등을 몰랐다. 사장님이 많이 힘드셔서 월급을 못주시나 보다 하고. 하지만 기본 생계도 유지할 수 없는 회사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다고 사 표 내고 밀린 월급을 줄 테니 조금만 더 버터 달라고 신신당부해서 3개월 더 근무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다행히 월급은 다 챙겨주셨다. 그리고 나는 화학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 후 5년 후 어디선가 본 듯한 전화를 받았고 그 신입사원이었다.
과장님 잘 지내셨어요라고 전화가 왔고 나는 그냥 평범한 회사에 취직해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했다. 오늘 시간 잠시 되면 만날 수 있으세요. 그리고 그 영민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물었더니 다른 광고회사에 취직해서 벌써 5년의 세월을 다녔고 작은 만한 프로덕션을 차려야 되는데 과장님이 필요한데 새로 이 광고 사업을 해보는 것은 어떠할까요.? 두말없이 나는 거절하였고 지금 생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다음 날도같이 일하자고 제안을 했었고 그러다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문득 그 후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배고프지만 자신만의 사업을 안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자꾸 떠 올랐다. 며칠을 고민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동업을 하게 되었다.
선배님 우리 한번 큰 꿈을 가지고 다시 한번 광고를 해보는 것 어떨까요.? 나는 승낙했고 프로덕션을 차렸다. 처음에는 케이블 Tv제작을 하였고 병원 영상도 그리고 먹방 프로그램도 하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일도 그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이제는 프로덕션의 공동 사업자로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사사건건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자유롭게 형식에 메이지 말고 진행하자고 했지만, 늘 안된다고 했다. 정확하게 일을 해야 된다고 했다. 우리가 컴퓨터 일도 아니고 공장 자동화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일을 진행해야 되는지 프로덕션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사건건 일에 서로 부딪혀서 그 후배와는 2년 후 결별을 하고 그래 각자의 삶대로 살아가자 하고 그 후배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프로덕션을 만들게 되었다. 잠깐 공백기도 있었지만 20여 년을 각자의 대표로서 일을 지금은 하고 있다. 어느 날 술자에서 그 후배가 선배님 그때 제가 너무 무례한 요구를 해서 사과를 했고 나도 시간이 지나서 너의 업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며 더욱더 사업 파트너로서 돈독히 이어나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 신념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똥꼬 집을 부렸던 것 같다. 후배도 그때 자기주장을 왜 그렇게 내 세웠는지 이해가 할 수 없었고 선배님의 말씀들이 지금은 이해된다고 하였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에 전반적인 미디어업이 하향세를 더 많이 타고 힘든 시기지만 서로 힘들 땐 함께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파이팅하고 있다.
벌써 몇 번의 이별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제는 호형호제처럼 함께 서로 도와 가면서 잘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결별의 시간을 잘 넘기고 오랫동안 인연을 지켜왔던 것은
"서로가 틀리다는 생각에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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